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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정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5-10 10:14 조회4,696회 댓글0건

본문

5·16 군사 정변(五一六軍事政變)또는 5·16 군사 쿠데타(五一六軍事 coup d’État)는 1961년 5월 15일 저녁부터 1961년 5월 18일 정오 무렵까지 서울, 부산, 대전, 광주, 김포, 부평, 수색, 포천 등에서 쿠데타를 목적으로 일어난 유혈 군사반란을 말한다. 주동자는 서울을 관할하는 제6 관구의 전 사령관이었던 박정희로 밝혀졌으며 그는 미국에 의해 지방으로 좌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삼군의 참모총장 몰래 십수명의 장성 및 수십명의 핵심 영관급 장교들과의 사전모의를 통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고자 하였다. 사전에 참여 병력으로는 김포 공수단 1000여명, 해병 제1여단 1300여명, 6관구 사령부 소속 병력 1700여명,[1]제6군단 포병단 5개대대 3000여명과 제5사단(사단장 채명신 준장이 이끌고 서울 진주), 제12사단(사단장 박춘신 준장과 부사단장 및 작전참모가 이끌고 춘천 진주), 제30사단(부사단장, 작전참모, 헌병부장이 사단 이끌고 서울 진주), 제33사단(작전참모, 연대장 등이 이끌고 서울 진주), 그리고 2군을 비롯한 지방에 있던 여러 장교들까지 수만명에 이르렀다.

제2공화국은 이를 진압하고자 했으나, 공병대를 제외하고, 서울 인근에 있는 모든 전투 군부대가 이미 반란군에게 장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시작전 통제권을 쥐고 있던 주한미군 총사령관이 불개입 의사를 표시하고 2군단장 등이 사후동조를 하면서 휴전선 인근의 일선부대를 대거 차출해야 했던바 진압을 고의적으로 포기해버렸다. 이 사건의 결과로 한명의 민간인과 십여명 이상의 군인이 죽거나 다쳤으며 제2공화국은 와해되고 군인들이 세운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삼권을 장악해 3여년간의 군부독재를 실시하였다.

목차  [숨기기]
1 정변의 원인
1.1 CIA
2 전개
2.1 정변 초기
2.2 정변 성공 후 윤보선의 활동
3 결과
3.1 국가재건최고회의
3.2 5·16 군사 정변 직후
4 평가와 비판
5 후문
6 북한의 예측
7 관련 항목
8 각주
9 바깥 고리
정변의 원인[원본 편집]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09년 10월 11일에 문단의 출처가 요청되었습니다.)

윤치영,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던 그는 장면 내각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국무총리 장면
5.16의 발단은 정군 운동이었다. 이는 곧이어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김종필, 오치성, 김형욱 등 5.16 주체세력의 핵심 멤버 육사 8기생 9명이 1960년 9월 10일 이른바 충무장 결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2] 이들은 그해 말에 이르면 박정희를 혁명의 지도자로 세우자는 데에 합의하였다.[3] 박정희 소장은 만주군관학교 인맥, 군내 인맥 등을 이용해 장경순, 한웅진, 채명신, 이주일 등 자신과 알고지내던 육군장성과 6관구 참모장 김재춘 대령 등을 거사에 끌어들였고 김형욱 등이 육본에서 동지들을 작전참모로 추천하면 부관감실에서 근무하던 오치성이 인사발령을 내는 방식과 포섭한 동지의 인맥을 이용해 2차·3차 포섭하는 방식으로 제30사단, 제33사단장, 문재준과 6군단 포병단, 공수전단 등을 포섭해 나갔다.[4]이 과정에서 제1201야전공병대 포섭은 실패해였다[5] 따라서 조직은 포섭될만한 이들을 중심으로 비밀스럽게 조직되었다. 그러는 동안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였던 장면은 이러한 정보를 조금씩 보고받거나 입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김형욱 등은 전라도 국회의원들이 육군 장성들과 결합해 서울 인근 부대들을 포섭하려 한다는 소문, 족청계 장성들을 중심으로 일선 부대가 거사할 것이라는 소문 등 역정보를 3중, 4중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6] 심지어는 2군 부사령관 박정희와 육본과 후방 부대들을 동원해 거사하는데 육군참모총장이 그들과 결탁했다는 소문까지 공공연히 유포되어 장도영과 장면에게 각각 보고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5.16 주체세력은 전화, 모임에서 사장, 전무, 공사장 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사업으로 위장함으로써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그 결과 막연한 쿠데타설만으로 장성들을 체포하지 못하였다. [7] 오히려 그러려면 장도영이 장도영 스스로를 체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장면과 장도영은 각각 검찰과 군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근거를 잡는 데에 주력했다. 그러나 근거는 전무하였다. 오히려 군경합동수사 결과 체포된 김덕승은 허위진술을 해버렸다.[8][9]장도영 역시 백운상 대령을 대구로 내려보내 근거를 수집케 하였으나 쿠데타를 입증할만한 아무런 근거도 얻을 수 없었다.[10] 당시 미국 정보국과 장총리의 고문이였던 위태커는 정보를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정보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쿠데타 세력을 이용하기 위해 이러한 행동을 했을거라 보았지만[11] 실상은 장도영도 육군방첩대장 이철희 준장에게 속아넘어가고 있었다. 이후 박정희는 해병대를 끌어들이는 한편 윤치영, 임영신, 임병직 등의 인사들과도 사전에 여러 번 교섭하였고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함으로써 5.16은 발각되지 않고 마침내 성공에 이르게 된다.

군 내부의 알력다툼과 인사적체로 인한 불만을 쿠데타의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국군은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 일본군 출신, 만주군 출신, 함경도파, 서북파 등 여러 군벌로 형성되어 있었다. 창군 직후에는 광복군과 중국군 출신이 중용되었으나, 이들은 김구와 정치적으로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므로 이승만 정권 출범과 함께 주요 요직에서 제거되었다. 이후 이승만은 일본군 출신을 중용하였고, 훗날 이들의 세력이 비대해지자 다시 만주군 출신을 중용하여 일본군 출신을 제거하였다. 이런 와중에 박정희는 주류 세력에 편승하지 못했고 그와 함께 육사5기, 육사8기 그룹 역시 소외되어 승진길이 막혔다. 결국 이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하극상을 일으키게 되고, 그들이 주도 세력이 되어 하극상파를 이루어 쿠데타을 주도한다.[12][13]

박정희를 주축으로 한 군사혁명위원회는 제2공화국의 정치력 부재와 사회·경제적 혼란, 그리고 군 내부 인사들의 응축되어 있던 불만이 촉발된 성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CIA[원본 편집]
1964년 5월 3일 BBC 인터뷰에서, 앨런 덜레스 CIA 국장은 "재임 중 CIA의 해외 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5·16 군사 정변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방어하는데 성공한 친미 이승만 대통령을 물리적 폭력시위로 강제로 내쫓은 4.19 혁명을 반미혁명으로 판단해, 조속히 친미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당시 발발한 반미 쿠바혁명 때문에, 쿠바혁명을 모방한 반미혁명이 전세계로 유행처럼 퍼져나가는 것을 크게 우려했으며, 4.19 혁명도 이러한 제2의 제3의 쿠바혁명으로 판단, 시간이 더 지나서 혁명이 공고해져 쿠바처럼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이전에, 서둘러 친미혁명을 일으켜 반미정부를 전복시켜야만 한다고 판단했다.

전개[원본 편집]
정변 초기[원본 편집]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육사 3-5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부사관과 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문재준 대령 제6군단 포병단 지휘관과 박치옥 대령 등은 곧이어 박정희가 부의장으로 취임하고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이 의장으로 추대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해 전권을 장악하고, 정변의 성공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당시 상황에서 헌법상의 국정·국군 통솔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에게 있었다. 그는 장도영의 전화를 받고 새벽 4시경 미국 대사관으로 향해 군사 세력을 진압하려 했지만 직원이 부재중이라 들어갈 수 없었고 카르멜 수도원으로 피신하여 수차례 미국에 사태 진압을 요청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장도영으로부터 정변이 발생했으니 피신하라는 연락을 접하였다. 그 직후 국제연합군 사령관 매그루더와 주한 美 대리대사 그린은 윤보선을 접견했다. 접견자리에서 두 사람은 윤보선에게 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자고 주장하며, 국제연합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군부를 인정하지 않고 진압명령서를 들고 대통령 윤보선을 찾아가 '사인만 하시면 반란군을 진압하겠다'고 하였으나 윤보선은 "국군끼리 전투를 벌여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북한의 공산군이 기회를 노려 남침한다."며 끝까지 반대했다. 주한 美 대사 그린은 마지막 경고로 "각하의 이번 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14] 그러나 5·16 쿠데타 이후 그는 당시 정변 주체세력들의 계엄령 사후 추인과 정변 지지성명 발표 요구를 모두 거절했다. 그가 일면으로는 '싸움을 피하기 위해, 다른 일면으로는 장면 내각에 대한 적개심'[15] 때문에 진압 행동을 거부했다는 분석도 있다.[16][출처 필요] 한편 정변의 성공을 잘 알 수 없었던 박정희는 매우 초조해하며 흥분한 상태였다. 이즈음 장도영은 비밀통로를 이용해 제8군 미군사령부를 오가며 매그루더 장군과 이야기를 했다.[출처 필요]5월 17일, 매그루더는 박정희 소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박정희 소장은 절대적으로 군을 물릴 수 없다는 의지를 보였다.[출처 필요]5월 18일, 박정희는 유원식(兪原植)을 데리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그러나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군을 진압하기보다, '올 것이 왔다'며 체념하는 태도를 취하였다.[출처 필요]5월 20일에는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고 장도영을 헌법에는 없는 "내각수반"으로 임명하였다.

정변 초기에 미8군 사령관 C. B. 매그루더, 야전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기도 하였으나 美 정부의 신속한 지지 의사 표명, 장면 내각의 책임 자각형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의 체념 등에 의하여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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